| 성공한 사업가로 변신한 김용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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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1년 북한에서 귀순한 김용(44) 씨.우리에게 귀순가수로 널리 알려졌지만 지금은 연매출 100억원대의 음식점 사장이 됐다. 특히 최근엔 중국의 특급호텔까지 인수, 성공한 사업가로 확실히 변신했다. 김 사장의 고향은 자강도 강계. 12살때 자강도 체육단에 입단해 7년 동안 체육단 생활을 했다. 체육단 생활은 강인한 체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됐다. “역경을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체력인 것 같습니다.” 체육단 생활을 마친 그는 김정일 예술대학에 입학해 성악을 공부했다. 예술대학을 졸업한 그는 평양국립교향악단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몇년 동안 가수활동을 하다보니 욕심이 생기더군요.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그는 기업 경영학을 공부하기 위해 북한 명문대 중의 하나인 김책공업대학에 들어갔다. 비록 공산주의 사회에서 기업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이 것이 회사를 경영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학교를 졸업한 김 사장은 중앙당 산하기관에서 간부로 5년 동안 근무했다.“북한에서 중앙당 간부의 파워는 대단하죠. 평등한 사회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당 간부는 귀족과 같은 특권층 대우를 받습니다 . 특히 저희 부서는 해외 출장이 많은 부서이기 때문에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많은 생활을 했습니다.” 해외 체류기간이 길어지면서 그는 남한 사회에 대한 많은 소식을 접했다. “처음에는 다른 체제에 살고 있는 남한사람들에게 왠지 모를 경계심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진한 동포애를 느끼게 되었죠.” 러시아 사태를 지켜본 김 사장은 공산주의의 한계성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고 남한 동포를 만나면서 차츰차츰 물질에 대한 욕심이 생기게 된다. 91년 그는 더 넓은 세상을 보기 위해 드디어 탈북을 결심했다. “공산주의의 한계성을 느끼게 됐죠. 자본주의를 알아야겠다는 신념으로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김정일 예술대에서 성악 전공 귀순에 성공한 김 사장은 정부의 배려로 92년 관광공사 홍보실에 입사했고 방송 활동도 시작했다 “북한에서 가수 활동을 했다는 것을 알고 방송사에서 출연요청을 하더군요. 한참을 망설이다 승낙했는데 그것이 계기가 돼 연예인 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94년 김 사장은 한국관광공사를 그만둔다. “하는 일 없이 이름뿐인 자리에 앉아 월급을 받아가니 월급 받는 날이면 눈치가 보이더군요.”회사를 그만둔 김 사장은 본격적으로 방송 활동에 나섰고 수입도 짭짤했다. 하지만 외로움은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법. 혈혈단신 귀순한 김 사장은 항상 외로움에 목말라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김 사장은 방황하던 이모 군을 만나게 됐고 동생처럼 지내게 된다. “집에 데리고 와 식구처럼 지냈습니다. 가끔 어머님이 오셔서 반찬도 해주고 청소도 해주셨죠.”그는 이군과 그의 어머님을 친 가족처럼 여기고 믿고 지냈다. 하지만 얼마 후 김 사장은 생애에서 지울 수 없는 아픈 상처를 받게 된다. 믿고 지내던 이군의 어머니에게 돈을 빌려주었는데 사기를 당한 것이다. “외로운 한국생활을 하면서 부모·형제를 생각하며 안 쓰고 모아둔 돈인데…. 돈보다도 가족처럼 믿고 지낸 사람들에게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돈도 잃고 마음에 상처를 입은 그는 한동안 방황을 했다. 그에게 한국은 냉혹한 동포의 땅이었다. “당시엔 창피하고 부끄러워 하늘을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1년 여 방황한 김 사장은 다시 재기에 나선다. “돈이 없어 항상 친구들에게 신세를 졌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음식재료를 사서 집에 데리고 가 북한음식을 만들어주는 게 고작이었죠. 그런데 음식을 먹어본 친구들이 솜씨가 좋으니 식당을 한번 해보라고 권하더군요. ” 95년 김 사장은 식당을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창업자금을 마련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여기저기 알아봤더니 담보가 없으면 대출이 안 되더군요. 지점장이 보증을 서 5,000만원을 대출 받아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돈이 없는 김 사장은 일산 변두리에 작은 식당을 열었다. “처음 1년간은 죽지 못해 살았습니다. 가게가 외지에 있었고 북한 음식에 대해 낯설던 때문인지 손님들이 거의 없었습니다.”문제는 음식 맛이 너무 북한식이라는 점이었다. 김 사장은 실향민 출신인 손님들의 충고를 듣고 음식 맛을 바꾸기 시작했다. “음식 맛을 바꾸고 <6시 내고향>에서 북한 음식 특집방송을 하게 됐습니다. 그후 차츰차츰 알려지기 시작했죠.” 중국 천진의 특급호텔 인수, 8월 말 오픈 남북화해 무드와 함께 북한음식은 각광을 받게 됐고 김 사장의 모란각은 3년 사이 35개의 체인점을 거느리게 됐다.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요즘 김 사장은 방송활동도 중단한 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낸다. ‘제2의 도약’을 위해 지난해 12월 중국 천진시에 있는 특급호텔을 인수, 8월 말에 오픈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초호화 호텔은 아니지만 모란각을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으로 최고의 호텔을 만들 계획입니다. 조만간 호텔을 거점으로 코리아타운도 만들고 싶고요. 그리고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자선단체도 설립할 계획입니다.” 98년 재일교포 김선혜(38) 씨와 결혼해 아들(지훈· 4)과 함께 일산에 살고 있는 김 사장은 “돈은 쫓으면 안됩니다. 일이 좋아 열심히 하다보면 돈은 자연히 들어옵니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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