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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라이프]미용업계 代母 이가자 원장[4]
추천 3 | 조회 6467 | 번호 380 | 2006.11.01 15:35 금융플라자 (financemas***)
미용업계 代母 이가자 원장
이가자 헤어비스’의 이가자(62) 원장은 환갑의 나이에도 불구, 아직 가위를 놓지 않는다.“일하는 데 나이는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열정이죠.” 이 원장은 열정과 노력으로 80개의 체인점을 개설하고 국내 미용업계의 대모로 우뚝 섰다.

그는 스스로 ‘튀는 여자’라고 말한다. 항상 앞서가려 하다 보니 주위 사람들로부터 ‘유별난 여자’란 소리도 많이 들었단다. “요즘처럼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는 제자리에 있으면 퇴보하는 겁니다. 항상 변하고 새로워져야 성공할 수 있지요.”

그가 튀기 시작한 것은 27살부터. 용인의 부유한 집으로 시집간 그는 평범한 주부생활에 싫증이 났다. “집에서 살림만 하다 보니 답답해서 못 견딜 것 같더군요. 뭔가 내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습니다.”

첫 아이를 낳자마자 그는 본격적으로 사업 구상에 들어갔다. 문제는 시어머니의 허락을 받지 못한 것. “시어머니한테 장사를 하겠다고 하니 ‘무슨 소리냐’ 며 펄쩍 뛰더군요.”

시어머니의 반대가 거세지자 그는 남편을 뒤로한 채 가출을 한다.“가정부와 함께 2살난 아이를 데리고 무조건 서울로 상경했습니다. 막상 서울에 오니 내가 할 일이 마땅치 않더군요. 이런 저런 생각 끝에 미용일을 배우기로 결심했습니다.”

미용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을 당시 그는 미용사가 되려고 작정하고 7만원에 구로동에 있는 허름한 단칸방을 마련했다. 그러나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일을 구하기 위해 미용실을 전전했지만 갓난아이가 있는 28살의 아줌마를 누구도 반겨주지 않았다.

고민 끝에 올케에게 70만원을 빌려 아예 미용실을 열었다. 청파동에 5평짜리 미용실을 마련한 그는 2명의 미용사를 고용하고 본격적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어려움에 부딪혔다. 고등학교 때 미용사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가위 한 번 잡지 않은 장롱 면허였다. 기술이 없는 상황에서 미용사를 고용해 운영하다 보니 남는 게 없었다.

이 원장은 부족한 기술을 보강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자나 깨나 머리 생각을 했습니다. 잠도 안자며 미용 기술을 공부했죠.” 피나는 노력을 하다 보니 6개월 만에 직접 머리를 만질 수 있게 됐다.

미용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반대하던 남편도 서울로 올라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이 원장의 미용실은 입소문을 타고 항상 손님들로 붐볐다. 가게가 확장되고 소문이 나자 손님들은 하나둘씩 이씨의 출신을 묻기 시작했다.

“손님들이 ‘명동출신이냐, 조선호텔 출신이냐’ 하며 출신을 따지는 데 자존심이 허락 하지 않더군요.”이 원장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명동의 미용실을 답사하기 시작했다.

패션의 중심지인 명동에 있는 미용실을 돌아 이 원장의 내린 결론은 단 하나. 이 원장은 기술은 견줄 만한데 서비스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원장은 이왕 시작한 것 최고가 돼야겠다는 생각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6개월간 일본에서 공부한 이 원장이 79년 마포에 미용실을 열었다.

이 원장은 국내 최초로 실명제 미용실을 오픈했는데 바로 ‘이가자 미용실’이다. 이 같은 미용실 실명제는 당시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미용 및 패션업계에서 내가 최초로 실명제를 시작했죠. ‘앙드레 김’ 이나 ‘박준’등도 내가 실명제를 쓴 이후 나온 것입니다.”

이 원장은 미용실 위상을 높이기 위해 호칭도 개선했다. “당시 미용실 원장을 마담이라 불렀습니다. 물론 마담이 존칭을 붙인 말이지만 잘못 들으면 술집 마담과 분간이 안 가지요. 종업원간에 반말을 없애고 선생님이란 호칭을 도입했습니다.” 지금은 미용실에 가면 쉽게 들을 수 있는 호칭이지만 당시에는 파격적이었다.

이 원장은 최고의 재료사용과 양질의 서비스로 대폭적인 가격인상도 단행했다. “당시 명동의 커트 요금이 3,000원이었죠. 저희는 5,000원으로 올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것이 VIP 마케팅이었던 것 같아요.”

이 원장의 혁신은 장안의 화제가 됐다. 당시 톱 탤런트였던 원미경, 황신혜, 사미자 등이 단골 고객이 됐다. 이씨는 미용업계의 징크스도 깼다. “당시 미용업계엔 두 가지 징크스가 있었습니다. ‘여자 원장이 돈을 잘 벌면 남편은 백수가 된다’거나 ‘가게가 잘돼 점포를 늘리면 반드시 망한다’는 것이었죠.”

“여자가 돈을 잘 벌면 남자가 여유가 생겨 대부분 일을 안 합니다. 남편과 경제적으로 확실히 선을 그었습니다. 생활비는 같이 부담하고 통장도 따로 보관했죠.”

분점을 내면 망한다는 징크스도 깼다. “83년에 최초로 압구정동에 2호점을 오픈했습니다. 당시 내로라하는 명동 유명 미용사들을 스카우트했죠. 하지만 처음 1년 동안은 적자를 면치 못했습니다. 고민 끝에 이대로 물러서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직접 키운 젊은 제자들을 대거 투입했습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20대 젊은 미용사들은 새로운 패션을 주도했다. 2호점은 망한다는 업계의 징크스를 극복한 것이다. 이 원장의 이 같은 과감한 결단력이 이가자 미용실을 국내 최고의 노블레스 뷰티살롱으로 발돋움하게 했다.

“남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돈은 많이 벌지 못했습니다. 80년대 강남 개발 당시 남들처럼 땅을 샀다면 큰돈을 만졌겠지요. 하지만 나는 한눈팔지 않고 오로지 미용실 운영에만 매진했습니다. 돈 보다는 일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죠.”

환갑을 맞은 이 원장은 중국 공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미 5년 전 중국 최고 호텔인 북경호텔에 진출했다. “중국 상류층들이 이용하는 북경호텔은 입점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세계적인 미용회사와 경쟁을 해 당당히 입점을 했죠.”

그러나 중국 공략은 생각만큼 쉽지가 않았다. 이 원장은 국내는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고 직접 중국시장에 뛰어들었다. 요즘은 중국에 체류하는 기간이 더 길다. 돈보다도 자존심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이 원장의 열정으로 중국 사업은 최근 정상궤도를 찾았다. 중국 내에 8개 미용실을 오픈했는데 더욱 확대할 계획이다. “기업마다 10년 후 무엇을 먹고살아야 할지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문화 사업에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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