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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라이프]양복주문 클릭 한 번이면 OK
추천 1 | 조회 3249 | 번호 334 | 2006.11.01 14:01 금융플라자 (financemas***)
양복주문 클릭 한 번이면 OK
■ 1951년 전북 장수 출생/ 73년 대입검정고시 합격/ 80년 보령양복점 오픈/ 2000년 신지식인/ 2002년 에세이집《손끝으로 나누는 기쁨》출간/ 2003년 아시아 경진대회 우수상 수상/ 현재 명품보령양복점 대표

명품보령양복점 박정렬 사장
광주매일 제공
인터넷을 통한 맞춤양복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명품보령양복점 박정렬(53) 사장. 36년 동안 양복과 함께 산 박 사장은 시대의 흐름을 쫓아 인터넷으로 양복을 주문받아 제작해 준다. “사람들이 시간에 쫓기다 보니 옷을 맞추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맞춤과 동시에 가봉까지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박 사장은 시대를 앞서 나가야 남보다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늘 연구에 몰두한다. 한국인의 체형에 대해 분석한 후 양복 스타일이나 가봉에 반영한다. “시대에 따라 체형도 바뀝니다. 따라서 그에 알맞은 디자인과 패턴을 연구하여 계속 바꿔 주어야 합니다.”

백화점에 진열된 명품 양복들을 사다가 직접 분해하고 연구할 정도로 양복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박 사장은 현재 아들과 함께 양복점을 운영하고 있다. 한번 찾은 고객들은 꼭 다시 찾아온다는 종로 5가에 위치한 그의 양복점. 5평 남짓의 공간에서 시작한 것이 이제는 20여 명의 직원을 둘 만큼 성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박 사장의 성공에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51년 전북 장수군에서 태어난 그는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군대 막사에서 생활했다. 그때 아버지가 끓여주시던 누룽지 맛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학교 갈 나이가 되자 당시 흔치 않았던 가죽가방을 손수 마련해 줄만큼 아들에 대한 사랑이 컸던 아버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폐렴으로 돌아가셨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나밖에 없던 여동생까지 침을 잘못 맞아 목숨을 잃었다. 모두가 힘든 시대였지만 어머니와 단둘이 남은 박 사장의 어린 시절은 더욱 그랬다. 식구들을 잃은 슬픔도 잠시, 당장 먹고 잘 곳을 걱정해야 했기에 그는 어린 나이에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머슴살이를 시작했지요. 일년에 쌀 한 가마니를 받기로 했습니다. 당시 안 해 본 일이 없습니다.” 어린 나이에 체구도 작았던 박 사장에게 머슴살이는 고달프기도 하거니와 희망이 없기에 더욱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전주로 나가 양복일을 배우기로 결심한다.

“외갓집에서 재봉틀로 옷을 만드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후에 몰래 큰 바지를 꺼내 줄여 보았습니다. 줄인 바지를 입었을 때의 놀라움과 기쁨은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죠. 그래서 양복일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전주로 나갔습니다.”한 달에 500원의 월급을 받으며 재봉에 대한 기본적인 것을 배웠다.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69년 겨울, 그는 상경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즐겨 찾았다는 명동 힐튼양복점에 취직하여 기술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유명한 양복점에서 일하게 된 것은 행운이었지요. 첫발을 내딛은 곳이 일생을 좌우할 수도 있는데 시작이 좋았습니다.”

재단 기술을 배우면서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해 중·고등학교 과정 검정고시를 패스했다. 하루 4시간 이상을 자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살았다. 일감이 많다는 양복점만 쫓아다니며 재단일을 배우기 위해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기술만 배우면 그것으로 족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는 4년 만에 재단사가 되었다. 70년대 당시에 목이 좋은 자리에는 모두 양복점들이 들어섰다. 그러나 양복점을 차리기에는 돈이 부족했다. 그래서 취업이민을 결심하지만 늙으신 어머니를 생각해 결국 포기하고 만다.

81년 그는 종로 5가 한켠에 양복점을 열었다. 이민 생각에 명함과 서류들을 모두 버렸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이때부터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영업을 위해 직접 뛰어 다녔다.

IMF를 맞으면서 그도 위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했다. 어려운 시절에 봉사할 일은 없을까 생각하던 중 우리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을 찾아 이벤트를 연 것. 목사들을 위한 맞춤 양복 서비스가 바로 그것이다.

박 사장은 자신이 만든 옷을 입고 설교하는 목사들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지고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이 이벤트에 참석했던 한 목사님을 그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시골에 계신 터라 서울까지 갈 수가 없어 양복을 맞출 수가 없다며 문의한 것.

박 사장은 그 분의 사이즈만 받아서 제작에 들어갔고 며칠 뒤, 목사님은 너무 잘 맞는다며 한 벌 더 주문을 했다. 그는 이때 크기만으로 제작해 보자고 결심한다. 이것이 바로 인터넷 주문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IMF라는 힘든 시기를 기회로 바꾼 박 사장. 그는 여전히 사회봉사에 관심이 많다.

2000년 신지식인으로 선정되었고, 2003년에는 아시아 경진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한 화려한 경력을 지닌 박 사장의 꿈은 자신의 일을 가업으로 만드는 것. 지금도 그는 아들과 함께 양복점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일본의 장인들처럼 자신의 업을 대대로 이어가길 바란다. 발전하려면 다른 회사들보다 3년은 앞서야 한다는 각오로 일하는 그는 IMF 이전보다 오히려 매출이 늘었다고 했다. “불경기이긴 하지만 가격을 낮추고 박리다매를 추구하다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가봉하고 옷을 만드는 것은 봉사한다고 생각하면 되죠. 내가 조금 수고한다고 생각하면 고객이 쉽게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철저한 고객위주의 영업관을 지닌 박 사장. 맞춤 양복은 비쌀 것이라는 기존의 관념을 뒤엎고 기성복 수준의 가격대에서 자신의 몸에 꼭 맞는 맞춤 양복을 만들어 내는 것이 자신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사실 맞춤 양복은 한 벌에 100만원을 호가하는 것이 상례이지만 그는 그런 영업을 거부한다.

“정성껏 만들어 주었을 때 고객이 그 옷을 입고 오는 것에 큰 만족감을 느낍니다.”그는 원단과 색상, 디자인까지 선택 가능하고 체형에 맞춰 입을 수 있는 맞춤복의 장점을 강조하고 인터넷 주문 방식과 즉석 가봉을 통해 정체되어 있는 맞춤 양복계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홈페이지(www.tailorshop.co.kr)를 통해 양복이 제작되고 있는 과정을 상세히 소개한 사이버양복맞춤시스템을 운영하는 그는 앞으로 인터넷을 통해 사업을 더 확장할 계획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의 양복 기술을 외국인들에게도 선보이겠다는 것.

월 700여 벌의 양복을 제작하는 그는 돈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도구일 뿐 영원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돈은 쓸 때 좋은 곳에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손끝으로 나누는 기쁨》이란 신앙에세이집을 출간하기도 했던 그는 신앙인으로서 이 사회를 위한 좋은 곳에 쓰기 위해 돈을 벌겠다며 돈에 대한 철학을 밝혔다.

오프라인 매장을 확장하여 고객들이 더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고 싶다는 그는 고객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만드는 철저한 장인이다. 그의 양복사랑과 함께 장인정신 또한 대대로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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