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이전에 에듀머니에서 진행했던 가계부 수기공모 때 고운하늘님이 응모해주신 글입니다.
그냥 묵혀두기 아까워서 같이 공유해드립니다. 좋은 글 써주신 고운하늘님 감사합니다.
2000년 가을이었습니다.
그 무렵이면, 혹독한 IMF 체험기를 치르느라, 남편의 실직, 창업, 그리고 실패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어려움들을 무섭게 겪어내고, 전세 보증금을 담보로 톡톡히 수업료마저 치러낸 직후였습니다.
태어나 살던 곳에서는 도저히 취직조차 할 수가 없어, 멀리 지방의 소도시로 옮겨 살던 때이기도 했습니다.
어렵사리 겨우 남편의 취직이 성사되었기에, 물설고 아는 이 하나 없는 곳에서 어찌 살까 걱정해 볼 여력도 없이 바쁘게 이삿짐을 꾸려 아이들과 함께 떠났습니다.
근 이 년만이던가, 이제는 저에게도 기다릴 수 있는 남편의 월급날이 생기게 되었고, 곧 작으나마 저축을 할 수도 있으리라 들뜬 꿈을 꾸기도 하면서, 오랜만에 행복했습니다.
그 무렵, 난데없이 한 통의 우편물이 제게 날아 들었습니다.
그 날도 저녁 찬꺼리를 사기 위해 인근 슈퍼를 다녀오던 길이었는데, 그저 노랗기만 한 편지봉투 만한 크기가 저희 집 우편함에 꽂혀져 있더군요.
딸아이가 봉투를 집었고, 엄마 이름이라며 제게 건네주는 것을 별 대수롭지 않은 듯 식탁에 올려 두고서는 잠시 잊었습니다.
대충의 손질로 저녁식사 준비를 마무리 지어둔 후 잊었던 봉투를 열어 내용 확인을 하는 동안에도 사실은 어떤 내용의 우편물인지를 속속들이 알지는 못했습니다.
채권이라는 말들이 여기저기에 적혀져 있었고, 변제의무가 발생했다는 둥, 금번의 특별 변제기간을 이용하면 이자를 감면해 주겠다는 얼토당토 않은 문장들이 마구잡이 적혀져 있었던 것 입니다.
A4용지 한 장을 가득 메운 내용 중 제가 선명하게 이해하고 읽어 버릴 수 있는 건, 제 이름 석자 뿐이었던 것입니다.
잠시의 망설임 후, 몇 번쯤의 심호흡을 한 후 내용에 적혀져 있는 연락처로 전화기 버튼을 눌렀습니다. 지역번호까지 친절하게 적혀져 있는 그곳은 우리가족이 떠나온 도시였습니다.
그저 막연하게나마 제가 어딘가에 대금을 지불해야 하는 모양인데, 저도 모르게 무엇인가를 연체해 두었나 보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거든요.
신용카드 대금 몇 백 원을 연체한 사실을 몰랐다가 한참이나 지난 후에 그만 불이익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는, 믿기지는 않으나 엄연히 현실 속에 존재하는 이야기들을 들었기에, 저 또한 제가 모르는 사이, 어떤 요금을 그만 연체하고 말았구나...창피함에 얼굴까지 벌개졌습니다.
그랬기에 수화기에다 대고 재빨리 외쳤습니다.
제 이름 아래에 적혀져 있는 채권번호 담당자님을 바꿔 달라구요.
어서 빨리 이 일을 마무리지은 후 얼큰하게 김치찌개를 끓일 작정이었습니다.
“ O O O씨 아시죠?”
몇 번의 본인 확인을 거친 후 대뜸 수화기 안의 목소리가 제게 묻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낯설기만 한 목소리에게서 생뚱 맞게도 귀에 익은 이름 석자가 들려 오더라구요.
순간 제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앞으로 남은 생애 두 번 다시는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없는 이름임에 틀림이 없었거든요.
놀라움은 거기서 그치지를 않았습니다.
달랑 A4지 한 장의 종이가 간직하고 있는 비밀의 무게는 실로 엄청났습니다.
가슴이 세차게 방망이질을 해대기 시작했고, 더 이상 서 있을 힘 마저 잃어버려 스르르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일이 그 순간 제게 일어나 버린 것입니다.
아버지가 어느 분의 보증을 섰고, 대출금 전액이 상환되지 않은 체 채무자와 연락이 끊겨버렸기에, 그 다음 단계인 보증인 아버지에게 대출 원리금에 대한 변제의무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얼만큼의 변제의무를 이행 하셨던 것인지, 아니면 내내 속만 끓이다 그만 삶을 포기해 버릴 결심마저 하고만 것인지, 자세한 내막은 도무지 알 길이 없는데, 한 순간 전 거금 팔 백 만원의 빚을 갚아야만 하는 채무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김민정씨 찾느라고 우리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기나 아세요?”
남자 직원의 퉁겨지듯 내뱉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귓가를 왕왕 울려대기만 할 뿐 뭐라 한 마디조차 항변할 말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 쪽의 주장대로라면 일 년이면 한 두 차례 변제의무의 내용을 담은 우편물을 꼭꼭 발송을 했다는 것이고, 저는 노랑봉투를 받아든 것이 진실로 그 날이 처음이었던 것입니다.
난생처음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의 한복판에 그만 던져지고 보니, 일을 어떻게 진행해 가야 하는 것인지, 수습은 또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인지 도무지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철없이 아무생각 없이 전화기 버튼을 꾹꾹 눌러 대었던 조금전의 제 모습을 깨끗하게 지워 버리고만 싶었을 뿐입니다.
그나마 동생이 둘이 있어 채무금액이 조금은 줄어들었다며, 위로랍시고 목소리는 제게 말합니다.
혼외자이긴 하나 아버지의 자식으로 등재되어 있으므로, 나머지 금액에 대해서는 그들에게 청구를 할 방침이라고 친절하게도(?) 알려주더군요.
몸 여기저기에 붙어있는 거머리를 떼어내듯 급하게 그 날의 통화를 끝을 냈습니다.
아버지가 뭣 때문에 이제 겨우 마흔 아홉인 나이에 스스로 삶을 포기해 버렸던 것인지, 한참의 세월이 흐르고 난 뒤 알 수 있게 되었지만, 그리 썩 반가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직후부터 전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저녁상을 차리면서도, 아이들 목욕을 시키면서도 내내 심장은 쿵쿵 방망이질을 쉼 없이 해대었고, 머릿속은 생각들로 온통 난리법석이었습니다.
남편과 아이들이 잠든 깊은 밤이면 인터넷을 뒤져가며 해결방법을 찾는 일에 골몰했습니다.
팔백 만원이라니, 팔십 만원의 현금도 가지고 있지 않은 나에게, 난데없이 팔백 만원을 내어놓으라니 구경조차 해 보지 못한 돈을 빚이라며 모월모시까지 갚지 않으면 남편에게 알리는 것뿐만이 아니라, 가재도구 등에 가압류 딱지를 붙여두는 일마저 집행하겠노라 당당하게 소리치는 괴물 같은 사람들로부터 아이들과 내 가정만큼은 지켜야 한다는 오직 그 한가지 생각만으로 수많은 법률 싸이트 내 상담코너를 클릭하고, 일 분에 몇 백 원씩 하는 전화 상담을 하느라 수화기를 잡고 늘어졌습니다.
상속포기, 한정승인 등이 의미하는 내용들을 찾아다니며, 과연 제가 구제 받을 수 있는지 일말의 희망이라도 잡을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아버지 살아 생전 소유 하셨던 경차 한 대, 내용을 알 수 없는 (찾아봐야 푼돈일 뿐이라시던..) 보험 등을 처분 해야하는 이유 등으로 인감증명과 인감도장 등을 삼촌과 고모에게 건네 드렸던 기억들이 아슴프레 떠오르면서 실 날 같은 희망마저 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처분할 수 있는 절차가 아버지에게서 저에게로 명의가 바뀌었다가, 그리고 새로운 실소유자로 넘어가는 것이라, 그때 당시에는 회사에 매여 있어야 했던 사정으로 삼촌과 고모가 요구하시는 대로 서류와 도장을 준비해 드렸던 것입니다.
처분해서 생긴 비용은 당연히 일흔이 넘은 할머니와 새어머니, 그리고 어린 두 동생들의 생활자금으로 쓰여질 것이라 했고, 그 후로 곧 그 일들을 잊었습니다.
그러니 상속포기도 한정승인도 저에게는 모두 해당사항이 없는 일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제는 꼼짝없이 빚을 갚아야만 하게 생겨버린 것입니다.
이틀이 멀다하고 전화벨은 울려댔고, 때로는 화를 내기도, 어떤 날은 매달리며 통사정을 해보기도 했지만, 갚지 않아도 되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법이라는 게 권리를 보호해 주는 든든한 울타리가 아니라, 야차보다 더 무섭고 야속하다는 것을 절감하던 때였습니다.
하루하루 상환일자는 다가오고, 견디다 못해 마지막 필살의 무기를 꺼내 들었습니다.
말끝마다 법대로 처리하겠다는 그들의 말처럼, 저 또한 법대로 한번 해보자 했던 것입니다.
장문의 내용을 담은 내용증명을 발송하기로 작정을 한 것입니다.
아버지 자살의 원인이 채무변제에 대한 독촉에 시달리다 그렇게 된 것이고 보면, 빚을 갚으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손해배상을 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지, 억울해서라도 아버지의 목숨까지 앗아간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질 까닭과 의지가 없음을, 원통하고 분함을 나열하는 것으로 모양새를 갖추어 그 날로 우체국으로 달려가 발송도장을 찍어 버렸습니다.
한번 해 볼 테면 해보라지...그 날 만큼은 기세가 하늘이라도 찌를 듯 자신만만 세상에 아무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사람목숨보다 더 한 것이 세상에 있단 말인가!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있던 것 을요..갚아야할 빚이 있는 사람은 함부로 죽어서도 안 되는 것이던걸요.
결론적으로 ‘내용증명의 발송’은 치명적인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역효과가 발생하여 ‘OO보증보험’ 채권관리팀을 그만 들쑤셔 놓은 결과가 되고 말은 것입니다.
“김민정씨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우리도 더 이상은 곤란합니다.
어디 끝까지 한번 가봅시다. 우리 돈 안 갚고 배길 수 있는지...“
무섭고 소름 끼치는 최후통첩이 날아들었습니다.
그들은 지금이라도 당장 다섯시간 걸리는 이 도시로 날아와 볼품 없고 구질구질하기만 한 살림살이들에 뻘건 딱지들을 덕지덕지 붙여 댈 기세였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남편에게 알릴 수 없는 나의 속내를 그들은 아주 잘 활용했습니다.
신경계통이 보통의 사람들보다 지극히 예민하여 몇 번의 병치레를 앓았고, 체력 또한 그리 건강한 편이 아니라 매사 늘 조심하며 생활하는 사정을 그간 몇 번의 전화통화 중 구걸하듯 매달리며 말해둔 것을 그들은 역으로 이용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또 다시 남편이 쓰러지는 것을 보느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전쟁을 치르느라 집안 곳곳이 쑥대밭이 되는 것을 겪어 내느니, 차라리 ‘그깟 돈 팔백 만원’ 갚아 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우스운 것인가 봅니다.
귀한 나의 가족과 소중한 가정이 위협받는 순간에 이르자,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 머릿속을 가득 채웠습니다.
어서 빨리 갚아 버리고 평범했던 일상으로 돌아가고픈 소망에 듣도 보도 못한 거금 팔 백 만원이 ‘그깟 돈 팔 백 만원’ 이 되어 버리니 말입니다.
팔 십 만원의 현금조차 없었으므로, 팔 백 만원의 빚을 내어야 했습니다.
직업도 없는 그저 주부이기만 한 제가 팔 백 만원의 대출을 받기 위해 은행 문을 두드리는 건, 허공에다 발길질을 해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속 편하게 이율계산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빌릴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 무렵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신용카드의 사용 한도액의 인심이 후하던 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내 이름 있는 OO캐피탈 등에서도 신용대출 상품을 내어놓기도 했구요.
가전제품 몇 가지를 할부를 이용해 구매를 했던 것이 우수회원의 자격을 제게 주어, 육 백 만원을 최장 36개월 할부로 대출해 주겠다는 안내엽서를 노트 사이에 챙겨 두었었습니다.
무엇보다 유혹적이었던 건, 전화 한 통만으로 단번에 대출금이 통장으로 입금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갚을 수 있을까 없을까가 아니라, 과연 정말 단 한번의 확인절차 없이 통장으로 돈이 입금 될까의 여부를 두고 고민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전화기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습니다.
인적사항을 확인하고, 개인정보활용에 동의버튼을 누르니, 대출금액과 상환기간을 입력하라는 안내 메시지가 들려 왔습니다.
휴...큰 숨 한번 몰아쉬고 육 백 만원을 삼 십 육 개월에 걸쳐 갚겠다는 의미를 담은 메시지를 꼭꼭 힘을 주어 눌렀습니다.
두근두근 심장이 터져 버릴 지경의 시간이 흐른 후 드디어 수수료 얼마를 공제하고 실제 입금될 금액의 설명이 들려 오면서 매월 상환일자와 금액에 대한 멘트가 줄줄이 이어져 들려왔습니다.
드디어 대출절차가 끝이 난 모양이었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도 얼마동안은 함부로 통장의 잔액확인을 해 볼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돈이 입금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면,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쉽사리 대책을 세울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십 여분의 시간이 더디게 흘러간 후 통장확인을 해보았습니다.
성공적으로 대출이 완료되어 있었습니다.
부족한 금액 이 백 만원은 신용카드 현금서비스를 이용했습니다.
자투리 모자라는 몇 만원은 생활비에서 살짝 가져 왔구요.
'OO보증보험 채권관리팀‘ 으로 던져 버리듯 ’그깟 돈 팔 백 만원‘을 보내 버렸습니다.
허탈하면서도, 마음한편 속은 후련하더군요.
적어도 오늘밤부터는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겠구나 싶었으니까요.
며칠 뒤 OO 보증보험 채권 관리팀으로부터 우편물이 왔습니다.
채무 액 팔 백 만원에 대한 완납 증명서이면서, 이상으로 본 건에 대한 아버지 장녀인 저의 채무변제의무는 종결한다는 내용으로 커다란 도장이 쾅 하고 찍혀져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삼 년 동안 알뜰살뜰 아끼고 모아, 허리띠 질끈 동여맨 체 열심히만 살아내면 매월 원리금 납부에는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로써 실로 몇 년만에 저에게는 다시금 가계부를 적어나가야 할 과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용돈기입장을 적으며 자라왔던 터라, 결혼해서도 가계부 적는 일을 게을리 하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나 남편의 수입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외벌이 가정이었기 때문에, 아끼지 않으면, 궁상을 떨지 않으면 다달이 적자를 면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계부를 적는다고 쓸 돈을 안 쓰게 되고, 안 쓸 돈을 더 많이 쓰게 되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혹 말씀하시기도 하지만, 가계부를 쓰게 됨으로서 반드시 써야 할 돈이라면 적게 쓸 수 있는 지혜가 생기고, 안 쓸 돈이라면 절대로 쓰지 않는 고집이 생기게 됩니다.
분명 얼마 쓰지도 않았는데 텅 비어버린 지갑을 만지작거리고 있노라면, 꼭 뭣 에 홀린 것만 같습니다.
그럴 때 가계부를 들여다보면 돈이 빠져나간 곳이 한눈에 쏙쏙 들어오는 것입니다.
헛투로 얼마를 썼는지를 따지고 들어 스스로를 자책해가며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반성의 시간을 갖는 것도 가계부를 씀으로 해서 얻을 수 있는 값진 효과들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이렇듯 나쁜 점보다는 좋은 점이 훨씬 더 많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주부라면 일단은 적기부터 해야하는 의무덩어리 가계부 적는 일을 실은 지난 얼마동안은 하지 않았습니다. 밀쳐두었습니다.
어쩌면 수입이 없을수록, 가정경제가 어려울수록 더더욱 적어 내려가며 꼼꼼하게 관리가 되어야 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계부 들여다보는 일이 죽기보다 더 싫고 무서웠기에 당분간이나마 덮어버린 것입니다.
단돈 몇 십 만원이라 하더라도 우리 가계에 일정한 수입이 생기면 그때부터 다시 적어나가리라 결심했던 것이었는데, 떡 하니 팔 백 만원의 빚을 떠 안게 되고 보니 빚을 갚을 수 있는 길이란 다시금 가계부를 적어 나가며 무섭도록 돈 관리를 하는 길 뿐 이었던 것입니다.
그맘때 남편의 급여 실 수령 액이 백 십만 원이 조금 넘을 때였습니다.
수입이 한푼도 없었을 때의 기간 또한 짧지 않았으므로 무조건 감사하다 여기며 살아야 할 때였습니다.
급여에서 매월 무조건 이 십 만원이 넘는 금액이 원리금으로 빠져나가야 했습니다.
급여가 입금이 돠고 나면 일단 원리금부터 먼저 공제해 둔 후부터 식비, 공과금, 남편 용돈 등에 대한 배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은 쓰리고 아프지만, 당분간만큼은 저축의 꿈은 접어둔 체 오로지 빚을 갚는 일에만 몰두해서 살아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고도 아껴야 하고 참아야 할 일들은 분명 대단히 많을 것입니다.
가계부를 쓰기 시작하면 저는 여러 개의 봉투를 간직한 체 한 달 내내 종종걸음을 칩니다.
그전에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어느 프로그램에서 정보를 얻은 것인데, 한 달 동안 지출될 예상금액을 가지고서 다시금 부식비/관리비/공과금/학원비/기타잡비 등의 명목으로 세세하게 분류를 하여, 따로따로 봉투에 담아둔 체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콩나물을 사러 가면 부식비 안에 든 돈 중 천 원 짜리 한 장을 꺼내어 부식가게로 뛰어가고, 전기요금을 납부하러 은행을 갈려면 공과금 봉투 안에 든 돈의 일부를 떼어 전기요금을 납부하는 방식이지요.
지금은 맞벌이를 하느라 그리 시간이 넉넉하지 못한 탓에, 대부분의 공과금 등을 자동이체 시켜두고 있어 고지서와 봉투를 들고 은행으로 달려가는 일은 없지만, 그때만 해도 이 방법을 철썩 같이 지켜가며 각각의 봉투들에서 한 달이면 십 만원쯤이 넘는 흑자경영으로의 목표달성을 이루어내곤 했습니다.
각각의 봉투들에서 쪼개어 아끼고 남은 금액들이 십 만원쯤이 넘는 돈으로 모아지면 원리금을 납부하려 따로 떼어놓은 금액 중에서도 딱 그 만큼씩이 남게 되곤 하는 것입니다.
한 달 에 한번쯤 삼겹살 파티를 열어주려 예상액을 챙겨두었다가 막상 그 날이 되어보니 금액이 살짝 모자라거나, 아니면 너무나 딱 맞아 아무것도 남는 게 없을 것 같은 위기감(?)이 닥쳐오면 삼겹살이었던 메뉴명은 두루치기나 돼지고기 듬뿍 넣은 김치찌개 등으로 급선회를 하곤 했습니다.
빚을 갚아야 하는 기간동안만은 어쩔 수 없게도 ‘질보다는 양이 우선’의 법칙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한 달 내내 살아봐도 외출 한번 할 일이 없는 저의 특성상 옷값/미용비/책값 등에 필요한 용돈의 지출은 전면 제로로 계획을 수립 해 두었습니다.
집에서는 움직임에 따라 슥삭슥삭 소리가 울려 퍼지는 깜장색깔의 츄리닝 한 벌로 일년 삼백 육십 오일 사계절을 나구요.
시장을 보거나 집 근처 슈퍼를 나가야하는 일이 생기면 살짝 청바지만 갈아 입어주면 외출준비 끝, 로션 하나만 있으면 일년이 거뜬하고, 머리는 질끈 동여 올리고서도 주체하기가 약간 곤란할 지경으로까지 자라 있으면 그것을 자르기 위해서만 미용실을 다녀오곤 했습니다.
마음에 생겨버린 고약한 종기 같은 것이었습니다. 빚이 말입니다.
어서 빨리 갚아버리지 않으면 곪아 터져 버릴까봐 걱정이 되고, 터져 버린 이후에는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절대적 두려움에 절약을 넘어 궁상의 정신으로 서른 여섯 번째 상환일자를 손꼽아 기다렸던 것입니다.
가계부를 쓰게 됨으로써 좋은 점은 돈의 행방을 제대로 알아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고 낭비벽을 고쳐 돈을 아껴 모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계부를 쓰게 됨으로써 좋지 않은 점은, 머릿속이 온통 돈에 대한 생각만으로 가득해진다는 것입니다. 자판기 커피 한잔을 뽑아 마시는 일에도 절대적 자유를 느낄 수 없는 강도 높은 구속력이 바로 가계부 안에 깃들어 있는 것만 같습니다. 가계부가 저를 울리기도 저를 웃기기도 하는 이유입니다.
꼼꼼하게 가계부를 써 온 덕분에 그리 힘들이지 않은 체(?) 삼십 육 개월을 무사히 살아왔습니다.
오지 않을 것만 같이, 까마득하기만 하던 서른 여섯 번 째의 상환일자가 다가오던 무렵, 우리 네 식구는 다시금 정든 도시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모셔와 식구가 다섯으로 늘었습니다.
남편과 저는 맞벌이를 시작함으로 해서 우리 가정의 공동가장이 되기로 했습니다.
맞벌이를 하게 되었다고 해서 흥청망청 써도 되는 형편이 아니었기에, 마음은 그 전보다 더 뻣뻣하게 굳어 있었습니다. 맞벌이라고는 하나 여느 집 외벌이 수준만큼의 수입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너무 많은 것을 바라게 된다면 그건 명백한 욕심이 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월수입 백 칠십 만원을 가지고, 우리가정에 필요한 모든 경제활동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 안에는 남편과 저의 노후준비까지 들어 있어야 했습니다.
일을 시작하면서 그동안 종이 위에 적어오던 가계부를 컴퓨터 안 엑셀 프로그램으로 대체를 했습니다.
십 여 년 가까이 모아둔 가계부랑 다이어리, 각종 영수증 등, 부피로 인해 차지하는 공간 또한 좁은 집에서는 부담스러운 존재인지라, 그렇다고 함부로 버릴 수만은 없는, 점점 더 늘어 갈 것만이 분명한 가계부 등의 활동공간을 아예 온라인으로 옮겨버린 것입니다.
옮기고 나니 좋은 점은 나중의 처치곤란의 문제 해결뿐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고 시도 때도 없이 우리 집 가계부를 열어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1GB 짜리 USB MEMORY 에 담겨져 있는 가계부 파일을 회사에서든 집에서든 실시간으로의 조화와 작성, 수정이 가능하니, 이제는 적어도 ‘아! 부족한 천 원, 대관절 어디에다 썼더라’ 고민하지 않아도 되게 된 것입니다.
1GB 정도면 아마도 제 평생토록 가계부를 쓰고 지워도 끄떡도 하지 않을 만큼의 용량일 것입니다.
이 거대한 USB MEMORY를 들고서 저는 오늘도 아침 여섯시 오십분이면 출근길에 오르는 것입니다.
얼마 전부터 거울을 들여다 볼 적마다 고민스럽던 일 한가지가 있었는데, 다름 아닌 꾀죄죄한 몰골이 보기에 딱할 지경이라는 것입니다.
취직을 하여 맞벌이를 하게 됨으로써 벌이가 많아진 것에 비해 씀씀이 또한 커진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슥삭슥삭 소리를 내어가며 츄리닝 만을 입은 체 출/퇴근을 고집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노랑고무줄 달랑 동여 메고 칭칭 감아 올린 머리를 연필꽂이에 꽂혀있는 볼펜으로 질끈 고정시켜둔 체 업무를 볼 수도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큰맘먹고 청바지 두 벌을 사고 머리는 단정하게 잘라 손질을 하였습니다.
얼마큼의 투자를 감행해야 거두어 드릴 것이 아닌가 스스로에게 중얼거리면서 말입니다.
머리가 너무 지저분하여 어떻게 다시금 투자를 해야하나, 좀 더 버텨야 하는가를 두고 며칠 밤낮을 고민했습니다. 되도록 가계부에 흔적을 남기는 일을 저지르고 싶지가 않았거든요.
고민을 거듭하다 지난날 가계부 파일을 열어 보았습니다.
대관절 머리 손질 한지가 언제인데 벌써 이렇게 되어 버렸나 싶은 마음에 말입니다.
2007년 04월 07일에 아이와 함께 커트를 하기 위해 미용실을 다녀온 기록이 있더라구요.
04월 07일이면 지금이 11월하고도 10일이 넘었으니 육 개월이 넘어 있었습니다.
어느새(?)...
가계부를 덮었습니다. 올 겨울은 너끈히 나고도 남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날씨도 점점 추워지는데, 추운 겨울동안 덥수룩한 머리로 얼마쯤의 보온효과를 누리다 따뜻한 새봄이 오면 신선하게 잘라주리라 마음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때부터는 거울을 들여다봐도 그리 꾀죄죄해 보이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겨우 육 개월 밖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역시 마음이 보배인 모양입니다.
마음 한번 잘 먹으니 금세 오 천 원의 거금이 고스란히 남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빚을 갚기 위해 오로지 매달려 쓰는 가계부와 내일을 위한 준비로 착실하고 꼼꼼하게 써 내려가는 가계부 또한 그 마음에 따라 쓰는 맛이 틀려집니다.
지금은 예전보다 상황이 많이 좋아져 월 급여액이 남편 것을 포함하여 삼 백 이십 만원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보험/적금/연금/학자금 저축 등의 명목으로 이 백 십 만원 정도를 무조건 공제해 두고 남은 백 만원이 조금 넘는 금액으로 다섯 식구 한달 생활을 꾸려갑니다.
솔직히 저는 조금쯤 더 저축을 하고 싶은데, 아무리 게산기를 두들겨 보아도 더 이상의 것은 무리라 이쯤에서 포기를 하여 둔 것입니다.
그래도 시어머니 몸 건강하시고, 아이들 또한 밥만 먹고 자라는데도 무탈하게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쑥쑥 커 주는 덕분에 예상치 못했던 지출들이 생겨나질 않아 가능한 생활이라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가계부를 기록하면서도 여러 개의 봉투들을 들고 종종거리지 않습니다.
공과금 명목으로 지출될 금액들은 미리미리 은행계좌에 입금을 하여 둡니다.
최대한 자동이체가 가능한 청구서 목록을 전부 은행으로 옮겨 두었습니다.
미처 날짜를 챙기지 못해 전기요금 한 달치를 연체한 후 곧장 은행으로 달려가 자동이체 신청을 해두었습니다.
봉투대신으로 이제는 매주 이 만 원씩을 주방 씽크대 지정된 장소에 놓아둔 체 집을 나섭니다.
일주일간 우리가족의 부식비입니다.
그 돈이 두부가 되어 보글거리는 된장찌개로 만들어지고, 얼큰한 콩나물국이 되는 일 등은 우리 시어머니의 수고로움으로 인해 우리 가족 저녁마다 누리는 호사가 되곤 합니다.
턱없이 부족하지만, 시어머니, 친정어머니에게 매월 정말 조금씩의 용돈도 드립니다.
이 다음에 돈 많이 벌어 꼭 더 많이 챙겨드리겠다는 굳은 약속 또한 빠트리지 않으면서요.
백 만원이 조금 넘는 돈을 가지고서 다 섯 식구 한 달 을 살고, 멀리 계시는 친정어머니께 부족하나마 건네 드릴 수 있는 작은 정성이 가능해질 수 있는 건, 뭐니뭐니 해도 ‘가계부’ 덕분입니다.
예측을 할 수 있어 미리 계획을 세울 수가 있고, 집행을 하고 결산을 하여 내일을 가늠할 수 있는 삶의 비법은 아마도 가계부 쓰는 일이 으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남편과 저에겐 꿈이 있습니다.
정말 꿈 같은 일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실현해 내고 싶은 소망이기도 합니다.
일 할 수 있을 때 열심히 일하고, 아껴 모아 야무진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 잘 키워 제각각 삶의 길로 떠나 보내 두고, 바닷가 작은 마을에 소담한 집 한 채를 짓고서 그곳에서 조용한 노후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을 지어두고, 도서관 살림을 꾸려나가는 것이 제 꿈이자 이제는 남편의 꿈이 되었습니다. 도서관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않아도 또한 좋겠습니다.
도서관 안에서 매일매일 저 만이라도 실컨 책을 읽을 수 있을 테니까요!!
책을 읽다 눈이 쪼글쪼글해져도 좋겠습니다.
그럴 때면 남편과 함께 뜨거운 차를 마시며 하늘도 보고 바다도 보면 그 또한 그리 썩 나쁘지만은 않을 테니까요.
유한적이었으나, 접어두었던 가계부를 다시 적어가기 시작하면서 팔 백 만원의 빚을 갚았습니다.
어려운 형편임에는 분명했으나 가늠할 수 있었기에 과감하게 객지생활을 청산하고 다시금 이 도시로 돌아올 수도 있었습니다.
남편과 저 취직이 됨과 동시에 열심히 성실하게 일만 했습니다.
아이들과 어머니 우리 가정이 따뜻한 보금자리가 되는 일에만 전력투구했던 것입니다.
일 년 후, 삼 년 후, 오 년 후, 십 년 후를 예상할 수 있기 때문에 오늘도 열심히 살아갈 이유가 되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성실한 가계부 덕분에 2009년 03월이 오면 진짜배기 우리 집도 갖게 됩니다.
주택구입자금 대출금을 2009년 03월에 전액 상환 할 계획이 이미 수립되었거든요.
수입이 줄어든다 하여도, 설사 부채가 조금 과해진다 하여도 가계부 쓰는 일은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희망으로의 돌파구는 바로 가계부 그 안에 있으니까요.
가계부만이 목표달성을 이루어줄 가정 바른 길 이니까요....
ps.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가계부를 쓰면서 돈에 대해 조금 덜 부담스러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자판기 커피 값이 아깝지 않을 수 있을 만큼의 내공이 쌓인다면 덕분에 한층 더 행복할 것 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사회적기업 에듀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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