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유산
우리나라 전 역사를 통해, 돈에 대한 남다른 가치철학과 운용원리를 깨우치고 또 실천한 현인(賢人)은 누구일까? 고려시대 이후 갑오개혁 전까지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신분서열의 중심 개념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사농공상(士農工商)의 패러다임 속에서 과연 그런 인물이 있었다 한들 미천한 신분의 상인에게 여백을 허락할 역사서(書) 역시 존재키 힘들었을 것이다. 헌데, 그 척박한 토양 속에서도 빼어나게 빛나는 흔적이 남아 있다. 신뢰와 무차입 경영을 모토로, 고려시대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한반도의 상업을 이끌었던 개성상인(開城商人)이 곧 그들이다.
독특한 지점운영 제도와 전문경영인에 의한 경영관리, 그리고 과학적인 복식부기 시스템을 창안하여 합리적 경영을 추구함으로써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개성상인들을 통해, 우리 조상들의 뛰어난 탁견과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특히 근검절약, 정직과 신용, 그리고 부채 없이 사업을 경영하고자 했던 개성상인들의 핵심가치들은 현대 경영이론의 관점으로 재해석해도 매우 높은 수준의 관점과 철학을 지닌 것들이다. 오늘날의 지점(branch)에 해당하는 각 지역 송방(松房)에는 이들의 상도(商道)를 집약한 3가지 슬로건이 벽에 걸려있었다고 한다. 의(義), 신(信), 실(實)의 삼도훈(三道訓)이 그것이다.
의(義)란 함께 일하는 사람 및 동업자와 의리를 지키며 협력하는 것이며, 신(信)은 고객에게 믿음을 주는 것이고, 실(實)은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근검 절약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윤에 기초하면서도, 항상 근검절약하며 파트너와의 신의를 잃지 않는 상도를 유지해 가고자 힘썼다는 이야기다. 이들의 활동 근거지였던 개성에서 어음과 환표(換標)가 현금과 동일한 가치로 통용되었음을 볼 때, 개성상인의 신용가치가 얼마나 높았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사실은 개성상인들의 중요한 경영원칙 중 하나가 ‘무차입(無借入) 경영’이었다는 사실이다. ‘남의 돈으로 장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여 신중한 사업운영을 함으로써 실속 있게 사업기반을 다져간다는 것을 뜻한다. 무리한 외부차입을 경계하고, 과잉투자를 방지하며 철저한 위험관리를 해나간다는 안정주의, 현실주의의 경영철학이다. 19세기 후반 당시 실질 이자율이 연 40% 수준이었고, 자본시장이 거의 발달되지 않았던 당시 상황에서, 사업의 안정성과 영속성을 위해 자기자본에 바탕을 둔 경영을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차입과 레버리지를 당연시하는 현대기업의 경영 원리와 비교할 때, 차별성이 돋보이는 원칙이 아닐 수 없다. 개성상인들의 상도(商道)를 확인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사개송도치부법(四介松都治簿法)이다.
‘사개(四介)’란 상자나 나무의 모퉁이 이음새가 서로 맞물리도록 만든 부분을 지칭하는 것으로, 봉차(捧次: 자산), 급차(給次: 부채), 이익(利益: 수익), 손해(損害: 비용)의 4가지 기장 원리를 뜻하며, 치부법이란 오늘날의 부기(簿記)를 말한다. 간단히 말하면, 4개의 계정과목을 통해 복식 부기하는 회계기법이 사개송도치부법이다. 거래 내역을 기록한 주요 장부도 4개였는데, 이 중 기본이 되는 것이 일기장과 장책이다. 일기장이란 매일매일 거래의 기록을 정리한 금전출납부를 말하며, 장책이란 복식부기에서 쓰이는 총계정원장에 해당한다. 이와 별도로 돈을 받지 않고 빌려준 것을 기록하는 외상장책, 물품거래내역을 기록한 물품거래장 등 다양한 보조장부를 함께 활용하였다고 한다. 거래사실에 대한 객관적 기록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서양보다 2백 년이나 앞서 창제된 이 독특한 회계기법은, 상거래를 통한 권리와 의무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자 하는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남으로부터 받은 것은 나중에 갚을 의무가 있고, 내가 남에게 준 것은 뒤에 다시 받을 권리가 있으므로 둘은 상호의존 관계에 있는 것이고 따라서 그 내용을 기록하는 것은 채권자와 채무자 간의 권리의무를 분명히 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라는 설명에서 보여지듯, 상거래의 관점을 단순한 금전대차가 아닌 신뢰라는 코드(code)로 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 우리은행의 전신인 대한천일은행은 1899년부터 1905년까지 6년 동안, 이 치부법으로 거래 장부를 기록했으나 1906년 일제의 강요로 서양식 거래 장부로 바꾸었다고 한다.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우리 선조 고유의 독창적인 발명품마저 맥이 끊어진 또 하나의 사례다.
한국형 재무관리 시스템의 최초 설계자라 할 수 있는 개성상인은 돈에 대한 개념을 크게 3가지로 정의했다. 돈은 모으는 것(集錢)과 쓰는 것(用錢), 그리고 지키는 것(守錢)으로 나눌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돈을 모으는 것에만 관심이 높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아무리 돈을 잘 벌어도 잘 쓰고 지키지 못한다면 부자가 되기란 불가능하다. 대강 이런 뜻이다. 이제까지 당신의 경제운용 철학은 돈을 모으고 쓰는 일, 다시 말해 열심히 벌고 잘 쓰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을 지 모른다. 그 동안 이 기준을 따라 열심히 살았는데, 돈이 왜 모이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다면, 생각을 바꿔라. 기존의 방법이 일견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았는가? 자연스럽게 돈이 모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이제 관점을 변경할 때가 되었다. 결국 자산관리의 핵심은 번 돈을 잘 지키는 것, 즉 수전(守錢)이기 때문이다. 다음 재무공식을 들여다 보라.
수입-지출=저축(or 부채)
벌어들인 수입보다 지출이 적으면 잉여가 발생하고, 지출이 많으면 부채가 발생한다.
100만원을 벌어서 120만원을 쓰면 20만원의 부채가 발생한다. 다른 한편 70만원만 쓰면 30만원을 저축할 수 있다. 우리는 부채 없는 경제생활을 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해답은 식(式) 안에 있다.
저축(부채 zero)=수입-지출
이 식은 좌변과 우변을 바꾸어 쓴 것에 불과하지만, 해석은 완전히 다르다. 한 달에 20만원씩 빚을 갚아 나가려면 수입 대비 지출의 차이를 (+)20으로 맞춰야 한다. 수입이 100만원인 사람은 80만원을, 200만원을 버는 사람은 180만원만 쓰고 나머지는 원천징수 하라는 뜻이다. 너무 쉬운 산수라고 생각하는 분들을 위해 한번 더 강조하도록 하겠다. 지금 당신이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자금운용 과정에서 범했던 가장 큰 실수는 돈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에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러므로 생각을 바꾸어 지켜야 할 돈(守錢)의 크기를 먼저 정한 다음, 지출흐름을 통제해야 한다는 말이다. 재무설계에서는 이 방법을 ‘통장 쪼개기’라고 부른다. 현금이 유입되는 통로는 하나지만, 유출되는 통로는 쓰임새에 맞게 분리, 운용하는 방식이다. 돈의 쓰임새가 원천적으로 강제되기 때문에 새는 돈을 방지할 수 있고, 자금 운용의 효율성을 기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다.
이자란 ‘현재의 소비를 희생한 대가’이고, 부채란 ‘빌린 돈에 약정한 이자를 함께 지불해야 하는 돈’이라는 점에서, 빚은 발생되는 순간부터 태생적으로 상환 의무를 지닌다. 타인의 희생을 빼앗은 결과이니 지극히 당연하다. 그런데 부채를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태도는 매우 관대한 것처럼 보인다. 빚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그리고 이런 관대한 의식 저변에는 레버지리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이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부동산은 반드시 오른다는 불패신화에 대한 맹신, 재테크 열풍, 시대에 뒤떨어진 개미보다는 21세기형 베짱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들이 한국인의 돈에 대한 관점을 변질시키고 있는 것 같다.
‘거꾸로’ 생각하기는 수입, 지출 및 부채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집는 것에서 출발한다. 우리의 목표는 부채 없는 순자산을 늘려가는 것이며, 따라서 부채(Debt)를 자산의 일부로 해석하는 기업재무적 관점은 개인재무에는 적합하지 않다. 재무 레버리지는 잊어라. 대출의 기술은 재테크적 관점에서만 유의미할 뿐, 부채 제로(Zero)를 목표로 하는 재무설계에서는 위험의 단초일 뿐이다. 재무관리의 초점을 오직 한 곳, 즉 가능한 한 빨리 부채를 갚고 균형 예산을 회복하는 것에 맞추어야 한다. 과거의 낡은 습관과 결별하자. 가계부를 쓰고 재량소득 안에서 빚 없이 살아가는 훈련을 하자. 부동산 불패신화에 대한 맹신을 떨쳐버리자. 무리한 대출을 발생시켜 가정경제를 위기에 몰아넣지 않도록 하자.
지금으로부터 1천년 전에, 매일 발생하는 입·출금의 내역을 꼼꼼히 기록하고 또 분석하면서 언제나 흑자 재정을 유지했던 개성상인들의 재무관리 도구(tool)가 일기(日記)였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상인의 일기란 곧 가정에서의 가계부와 같다. 따라서 귀찮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이 작업을 가볍게 생각해선 안 된다. 어쩌면 당신의 진짜 문제는 미미한 지출,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작은 낭비, 그리고 내가 희망하는 재무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씀씀이를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에 있는 지 모른다.
에듀머니 대표 문 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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